권리를 배려한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몇 년 전 지하철 노약자석에 붙은 ‘인권은 배려입니다’ 글귀가 적힌 국가인권위원회의 공익광고를 본 적이 있다. 나름 문제의식을 느낀 나는 위원회와 인권단체에 이 문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수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배려가 뭐가 나쁘냐.”

모든 인간은 법 앞에, 신 앞에 평등하지만 우리가 매일 경험하듯 현실에서도 그런 것은 아니다. 평등은 지향이고, 현실에서는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인권은 배려가 아니라 갈등하고 경합하는 가치다. 그런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주장은 이 희미한 평등 개념조차 우아하게 배반한다. 누가 누구를 배려해야 한다는 것일까? 돈 없는 사람이 돈 있는 사람을 배려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구조적 가해자(강자)가 피해자(약자)를 배려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정희진의 낯선사이]권리를 배려한다?

노약자석의 경우 장애인, 임산부, 노인에게 우선권이 있는 것은 배려가 아니라 그들의 권리다. 당연한 권리를 상대방이 선심을 베푼다고 주장하며 고마워할 것을 요구한다면 불쾌감을 넘어 억울한 일이다. 배려나 관용은 ‘잘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베푸는 선의가 아니다. 배려는 동등한 적대자(適對者 혹은 敵對者)와 자기 자신에게만 국한되는 윤리다.

대통령 선거 후일담은 끝이 없지만, 내게 인상적인 사건 중 하나는 서울 마포구청 도시경관과의 불법 행위와 ‘구민 혐오’다. 마포구에 사는 성적 소수자(LGBT,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트랜스젠더) 모임인 ‘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는 구청에 현수막 게시를 신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소연 무소속 대선 후보는 당초 현수막을 걸 계획이 없었지만 연대 차원에서 “지지와 성원에 노동자 계급 정당 건설로 함께하겠습니다”라는 낙선 사례와 함께 “LGBT, 우리가 여기 살고 있다” “이곳을 지나는 열 명 중 한 명은 성 소수자입니다”라고 적힌 이 단체의 현수막을 동반 게시했다.

그러나 구청 측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현수막을 철거했다. “청소년들이 유해 내용을 접할 수 있다” “과장 문구는 불법이다. 직설적 표현에 유해성이 있다” “문구가 혐오스럽다”는 것이다. 해당 부서의 주장은 선동에 가깝다. 이는 담당 공무원의 개인적 편견을 공무로 집행한 사적인 행위다.

대통령 선거 관련 현수막 게시는 선거법에 보장되어 있다. 철거가 불법임은 물론 현수막 내용을 ‘일개 구청’이 검열한 초유의 사태다(새누리당이나 민주당의 현수막을 구청이 검열, 철거할 수 있을까?).

통계적으로 어느 사회나 전체 인구의 51%는 여성, 10~15%는 동성애자, 10%는 장애인, 9%는 왼손잡이다. 이들이 정치적 약자일지는 몰라도 적은 인구라는 의미의 소수자는 아니다. 모든 동네에 이들이, 즉 ‘우리’가 살고 있다. 특정한 주장을 펼친 것도 아니고 남을 해친 것도 아닌데, 단지 “나, 여기 있어요”라는 알림(?)이 ‘유해, 혐오, 직설, 불법’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생각에 반대할 수는 있다. 그러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공중에 대한 공공연한 위협이다.

일부지만, 이들이 21세기 세계적인(?) 메트로폴리탄 서울의 공무원이라니! 동시에 나는 이들이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포구청 해당 부서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사건은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다. 나는 소수자로서 두려움을 느꼈다. 이 사건이 왜 문제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내 궁금증, 이 글의 요지는 이것이다. 만일, 현수막 내용이 “여기 우리가 살고 있다”가 아니라 “성 소수자(외국인 노동자, 성 판매 여성, 장애인…)도 인간입니다. 그들을 배려합시다”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우리 사회는 억압받는 당사자의 목소리보다 지위가 높은 명망가가 명분상 그들을 대의(代議)하는 방식을 좋아하고, 대중은 명망가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우산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같이 비를 맞는 것”이 인생이라면, 배려는 우산을 독점하고 선별해서 우산을 나눠주려는 권력의 만행을 도덕으로 포장한 행위다. 정말 배려하고 싶다면, 원래 보장된 남의 권리를 시혜로 둔갑시키지 말고 자기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 아니, 타고난 타인의 권리에 대해 자신이 판관 노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상식, 분별력, 주제 파악이 선행되어야 한다.

경쟁자를 배려한다면, 전쟁 중에 상대방을 배려한다면, 지치고 외로운 자신을 배려한다면 그게 마음의 평화요, 인류의 평화다. 배려는 이때만.

모든 차이는 임의적, 허구적인 것이다. 차이가 만들어지는 방식은 차치하고라도, 다름의 공존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그 누가 생존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기준에 따라 모두 소수자다. 단적으로, 나이들지 않는 사람은 없다. “소수자 배려” 운운 말고 자신의 소수자성을 발견하고 드러내 다른 소수자와 연락하며 살아야 한다(이 글은 권김현영 외 <성의 정치 성의 권리>에서 도움받았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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