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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강의 녹취록

[천수경 녹취][녹취] 천수경 3강 정구업진언

작성자법우|작성시간17.03.20|조회수1,980 목록 댓글 11

오늘부터 천수경 법문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천수경뿐만 아니라 어떤 경전을 봉독하던지

독송할 때 정구업진언을 먼저 독송을 하죠.

구업을 밝히는 진언입니다.

어떤 진언이든, 전에 말씀 드렸지만, 진언이라는 것은

특별한 뜻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뜻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총지라고 해서 그 안에 모든 공덕이 다 담겨 있다.

이런 표현을 했는데요.

왜 그렇게 진언을 총지라고 했느냐?

총지라고 한 이유는 뜻이 없지만 그 뜻 없는 가운데

그 이면에 담긴 참뜻, 낙처, 낙처가 어디인지

불교의 모든 가르침 모든 경전 모든 법문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입니다.

손가락이 아닌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불교에서 정말 가르치고 싶은 알맹이, 불법의 핵심은 달입니다.

불교에서 가르치고 싶은 바는 손가락이 아니라 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보라는 건데

우리는 손가락만 보고 있고 손가락이 불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경전이 불교라고 생각해요.

수행하는 거 불교에 있는 수많은 의례의식들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온갖 의식들

이런 모든 것들이 불교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손가락에 불과합니다.

다양한 의식들은 나라에 따라 다 다르겠죠.

어떤 나라는 이런 의식이 있고 어떤 나라는 저런 의식이 있고

사시 때 불공을 올리는 것도 역사를 이천오백년 이어오다 보니까 자리를 잡아서

불공이라는 형식으로 우리가 기도를 올리지만

불공은 말 그대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거잖아요.

부처님께서 10시부터 12시 사이 해가 정오가 되기 전에 한두시간 정도를

마을을 돌면서 탁발을 하러 다니셨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신도님들은 10시부터 12시쯤 사시쯤이 되면 부처님 오시리라고 예상을 하고 

미리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부처님이 오시면 공양을 드렸던 겁니다.

부처님이 오시면 합장하고 공양을 드리는 이게 불공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안 계시다 보니까 형상으로 만든 부처님이라도 방편으로 모시고

그때 부처님께 공양 올리던 정성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겠노라 하고

의례의식이 만들어지다 보니까 한시간씩이나 오래 염불을 하면서 공양을 올리고 하는 거겠죠.

그러다 보니까 절마다 문화가 다 다릅니다.

스님마다 다 달라요.

기도하는 방법 스님마다 다 다르고 절마다 종단마다 다르구요.

어떤 절은 불공 같은 거 별로 안하고 참선 위주로 하기도 하구요

기도를 해도 모든 기도는 참선만 하는 선원 같은 형식으로 운영하는데도 있고

어지간한 이런 저런 기도들은 따로 안하고 기도대신 수행을 하는 이런 절들도 있습니다.

천도제도 뻑적지근하게 음식을 차려서 하는 절들이 있는가 하면

요즘에 많은 깨어 있는 절들에서는 천도제 다리가 부러지게 안 차립니다.

과일 두 세가지 깔끔하게 이층 정도로만 간단히 올리고

과일하고 나물 세가지 정도만 하는 경우도 있고

과일하고 떡만 올리고 가볍게 하는 곳들도 많이 있어요.

선방에 문고리만 잡아도 대단한 공덕이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대단하게 여기는 선방에서는

천도제가 있을 때 간단하게 음식 차리고

그분들은 정성을 다해서 보시를 하고 싶다 보니까

49제를 하면서 오백만원도 천백만원도 내겠지만

어쨌든 거기서는 간단하게 차리고 죽비 세번 딱 치고 스님들이 앉아서 참선 잠시 하고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을 한 5분까지만 외우고 끝난다던가 이러는데도 그걸 가지고 욕하지 않습니다.

절마다 분위기가 다르고 종단마다 의식이 달라도 그게 다 통용되는 이유가 있어요.

이유가 그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라 그렇습니다. 

한절에 삼십년 사십년 오래 다니신 분들은 이 절에서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강하고 

그렇게 해야 정성이 담겼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다른 절에 가면 틀린 거 같고 저 스님은 잘못 하는 거 같고 저렇게 하면 안될 거 같고 이런 생각들을 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편견일 뿐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방편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중요한 것은 이 손가락을 버리기 전에는 결코 달은 볼 수가 없습니다.

저걸 보십시오하는데 손가락만 계속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달을 볼 수가 있겠습니까?

달은 절대 못 봐요.

손가락만 볼뿐.

그러니까 그 허례허식 의식, 그것이 물론 방편으로써의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방편으로써의 역할이 다 하고 나면 그걸 버리고 가야 되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도 하고 혹은 뗏목의 비유를 들기도 합니다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서 갔으면 파라미타(Paramita)했으면

저 깨달음의 언덕에 도달했으면

나를 깨달음의 언덕에 올라가게 해준 뗏목이 고마워서 뗏목을 짊어지고 길을 갈 것이냐?

뗏목을 버리고 가야 된다는 거죠.

즉 방편은 전부 다 버려야 될 겁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게 아주 중요합니다.

방편은 버려야 될 겁니다.

 

어제도 제가 불교아카데미를 한다고 하니까 어떤 분이 질문을 해요.

불교아카데미를 통해서 가장 핵심적으로 알려주고 싶은 게 뭡니까? 묻더라구요.

제가 그 얘기를 했습니다.

불교아카데미를 통해서 많은 분들에게 불교적인 지식을 늘어나게 해주거나

수 없이 많은 방편들을 알게 해주거나

무언가를 많이 주는 목적은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법당에 나와서 공부를 한다 할지라도 배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저한테 얻어 갈 수 있는 것은 사실은 없습니다.

물론 다양한 경전들을 공부하고 하면서 지식들을 쌓아갈 수는 있긴 하겠죠.

제가 어제 말씀 드렸잖아요.

이렇게 듣고 이쪽 귀로 흘려 버려야 한다고

이것을 쥐고 꽉 붙잡아서 이것이 진리구나 하고 이것을 쥐고 가면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설법을 하는 온전한 목적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여러분에게 무엇을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게 지식이 지혜가 되었든 지혜가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여러분들에게 그 어떤 것도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이것이다하고 쥐고 있던 것을

하나하나 빼앗아 가는 게 목적입니다.

여러분에게 전해 주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가지고 있던 것을 빼앗아 가는 게 목적이란 말입니다.

뭐냐? 예를 들면

번뇌, 망상, 삼독심, 집착과 욕심, 어리석음

이런 분별의 가려져 있는 그런 망상들 때문에 괴로워했던

즉 여러분들이 괴로움을 느낀다면

그 모든 괴로움은 내 스스로 분별로써 구축해 놓은 괴로움의 허상이거든요.

그것을 통해서 괴로워하는 것이거든요.

그렇게 혼자서 분별로써 이러한 괴로움을 만들어 놓고

이 괴로움이 괴로우니까 이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

불편이라는 방편을 붙잡아서

염불을 열심히 하면 괴로움을 없앨 수 있을 거야.

독송을 열심히 하면 괴로움을 없앨 수 있을 거야.

그 방편에 또 붙잡습니다.

안주하는 거죠.

불교에서는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게 불교 최상의 가르침이잖아요.

응무소주이생기심

불법에는 어디에도 머물 바가 없어야 합니다.

어디에도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안주해 있으면 안됩니다.

난 염불이 좋으니까 죽을 때까지 이것만은 놓지 않을 거야

염불 하나의 방편입니다.

방편만이 진리라고 생각해서 이것만은 잡고 있겠다.

 

어떤 방편이 되었든 이것만이 절대라고 해서 거기 또아리를 틀고 안주해 있으면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에서 말씀하시거든요.

불법에도 머물러도 안될지인데 하물며 비법에 머물러서야 되겠느냐

불법에조차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게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에요. 

그 모든 안주할 곳

그 모든 의지할 곳

그 모든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곳

그 모든 곳으로부터 벗어나야 됩니다. 

그랬을 때 진정 완전 자유로와질 수가 있는 것이겠죠.

 

물론 아직은 그런 지혜가 없다 보니까

다양한 방편들을 통해서 내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거죠.

비워지는 거에

불교는 플러스를 하는 공부가 전혀 아닙니다.

불교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끊임없이 비우는 공부  

여러분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 쥐고 있던 모든 것들 안주하고 있던 모든 것들을 빼앗아 오니까

불법을 공부하다 보면 아주 놀라운 환희심과 기쁨을 누리기도 하면서

잠시 잠깐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쥐고 살았거든요.

쥐는 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살았고

돈 명예 권력 지위 모든 것을 쥐려고 하고 살았는데

절에 갔더니 계속 놓도록 자꾸

나라는 것을 꽉 쥐고 살았고 내가 잘나고 드러나고 우월감을 느끼고 나라는 가치를 인정받고

이런 것을 주 목적으로 하면서 세상을 살았는데

그 모든 나라는 것을 빼앗아 버리니까

내가 쥐고자 하던 모든 것들을 빼앗아 버리니까 처음에는 당황스럽죠.

그런데 그것이 나를 진정 자유롭게 해준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됩니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놓아야지만 행복해 진다는 것에 눈 뜨게 되고

그렇게 되었을 때 놀라운 행복감

그전에는 단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정말 티끌 하나 없는 가벼움

경안이라고 하는데

아주 가볍고 경쾌한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제는 괜찮구나 하는 이런 것들을 느끼기 시작하게 됩니다.

불법을 공부하기 전에는 이렇게 되면 행복하고 저렇게 되면 행복하니까

절에서 열심히 기도해서 이렇게 되게 해주세요 저렇게 되게 해주세요.

이러면서 끊임없이 갈구하는 기도를 하다가

불법의 진수를 딱 맛 보고 나면 모든 갈구가 내려 놔 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놀랍게 자유로워집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가벼움을 느끼게 됩니다.

단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죠.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던 가벼움을 느끼게 되고

제가 어떤 말씀을 들어봤느냐 하면

지금까지는 이렇게 되기를 바라고 저렇게 되기를 바라고

이제는 그 어떤 일이 와도 괜찮다 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왜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다고 하는지

이것도 좋고 이것도 좋고

특정하게 갈구하는 바가 없다 보니까

무엇이 와도 괜찮게 되버리더라는 겁니다.

저절로 삶 전체를 수용하고 받아 드리게 되더라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가 이만큼 나아져야지만 자존감을 느끼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지금 불편한 몸 그대로

부족한 재능이나 외모나 돈이나 이것 그대로 괜찮구나.

이대로 괜찮은 것이었구나.

이대로 충만하고 원만구족한 것이었구나

이대로 내 인생은 놀랍고도 장엄한 아름다움이었던 거구나

그 사실에 바로 눈 뜨게 됩니다.

그러면 걸림이 없어져요.

정말 하루하루가 눈부시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괜찮은 삶을 살면서도

나는 지금까지 항상 갈구하는 것 때문에

남들과 비교하는 마음 때문에

더 많아져야 된다는 끊임없이 헛된 망상 속에

내 스스로 괴로워하는 착각 속에 살았구나 라는 것을 눈 뜨기 시작 하는 것이죠.

거기 눈 뜨기 위해서는 바른 법을 알아야 하고

바른 법을 알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 드린

방편의 뗏목, 손가락을 과감하게 내려 놓을 수 있어야 됩니다.

손가락 방편을 딱 내려 놓으면 딱 하나 달 그거 하나만 남습니다.

부처님만 남는 거죠.

이걸 법화경에서는 일불승이다 해서 한분의 부처 오직 하나의 부처

불이법이다 라고 해서 둘로 나뉘어진 것은 일체 없는

참마음 본래성품이다 라고 해서

우리가 본래 갖추어져 있던 원래 이미 가지고 있던

불성이라고도 할 수 있고 본래면목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자리

그 자리를 확인 하는 것이 바로

, 내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확인 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목적입니다.

그걸 불교에서는 낙처라고 불러요.

귀결점 이렇게 부릅니다.

스님들이 수많은 화두를 던져 주고 온갖 법문도 하고 하는데

수백 수천가지 화두가 있잖아요.

그런데 화두에서 젤 중요한 게 무어냐 하면

화두라는 말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화두가 가리키고자 하는 바 낙처를 깨닫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를 합니다.

우리에게 무엇을 주려고 큰스님들이 화두를 주었을까

모든 화두는 동일한 화두입니다.

낙처, 본성의 자리 이 자리를 확인하고자 하는

그러니까 화두를 머리로 헤아리면 그 사람은 전혀 화두를 모르는 거에요.

뜰 앞의 잣나무이런다고 해서

잣나무 저 잣나무에 뭐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을 통해서

뜰 앞의 잣나무라는 말 뜻을 따라 가기 시작하면

전혀 화두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겁니다.

애석하게도 우리나라에서 나온 많은 화두나 선어록을 해석한 책들 가운데도

화두를 머리로 해석해 가지고 이런 뜻이다 저런 뜻이다 하는 책들이 있어요.

난 선불교에 통달했다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고

그 동안은 그게 불교라고 생각하고 그게 선이라고 생각해 왔었습니다.

그런데, 화두는 뜻 따라 가면은 의미 따라 가면 결코 그 낙처를 볼 수가 없어요.

뜰 앞의 잣나무라는 말이나

마 삼근라는 말이나

라는 말이나

마른 똥막대기라는 말이나 전혀 다른 말이 아니에요.

거기서 얘기하는 낙처는 하나란 거죠

본래 면목이라는 우리 본래 성품, 본래 부처를 확인하게 해주고자 하는

거기에 낙처가 있다는 것이죠.

경전에서 진언이 있는 이유는

진언의 뜻을 따라가려는 게 아니라 진언의 낙처가 어디인지가 중요하다.

진언이 가리키고자 하는 바

그 낙처는 본래면목이라는 자기성품을 가리키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서 수리수리 마수리 수수리 사바하라고 한다고 해서

이것이 무슨 뜻이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 헤아리고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수리수리 마수리 수수리 사바하라는 말소리나 ’, ‘자나

이런 개념을 전혀 헤아릴 필요가 없고

수리수리라고 했든 마수리라고 했든 뭐라고 했든

옴마니반페흠이라고 했든 가나다라마바사라고 했든

숭산스님이 외국인들이 관세음보살 염불하라고 했더니

외국인들이 관세음보살 발음 너무 어렵다 좀 쉬운 걸로 가르쳐 달라 그랬더니

‘ABCD’ 하던가 코카콜라 코카콜라하던가

맘대로 아무거나 하나 붙잡고 해라 그렇게 했다고 하죠.

낙처가 말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관세음보살이라는 말 속에 어떤 낙처가 있는 게 아니에요.

코카콜라 코카콜라를 반복해도 염불의 효과가 있다.

아니 스님, 코카콜라는 보살님이 아닌데 그걸 부르면 어떻게 효과가 있습니까?

코카콜라가 왜 불보살이 아닙니까?

이 우주에는 둘로 쪼개진 게 하나도 없어요.

부처 아닌 게 하나도 없고 보살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말뜻을 따라가면 코카콜라와 관세음보살은 엄연히 전혀 다르지만

말뜻을 따라가면 낙처에는 이를 수 없습니다.

본래 자리에는 이를 수가 없단 말이에요.

불교에서는 중요한 게 말뜻 따라 가지 말라는 게 아주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모든 진언은 다 하나의 낙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진언이 광명진언 무슨 진언이 되었든 진언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에너지가 있을까?

이걸 하면 어떤 공덕이 있을까?

그건 초등학생 수준의 방편을 공부하는 사람들이고

우리도 옛날에 그랬습니다.

몸에 병이 있다 하면 요 진언을 주고

대학교 입학하고 싶다 하면요 진언을 주고

사업 번창하게 하려면 요 진언을 주고 이런 식으로 방편을 쓰긴 했는데

그건 하나의 방편일 뿐입니다.

그걸 통해 위안을 얻고 맘의 평안을 얻고 그럼으로써 고요함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방편일 뿐인데

수리수리라고 했든 코카콜라라고 했든 관세음보살이라고 했든 여러분 이름을 불렀든

영희야 철희야 라고 했든 가나다라마바사라고 했든 여기에 공통점이 있어요.

무어라고 부르든 모든 말은 공통점이 있어요.

말이라는 공통점 소리라는 공통점이 있죠.

이 소리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어떤 사람은 성대에서 나왔다.

성대에서 나왔다 하면 라디오는 성대가 없는데 어떻게 소리가 나오죠.

나무는 성대가 없는데 바람이 불면 휙휙하는 소리가 어떻게 나올까요.

성대에서 나오는 게 소리가 아닙니다.

몸 어디에서 나왔다

몸이 없어도 소리가 나올 수 있어요.

고양이가 야옹하는 소리

그것도 진언이구요.

바람 부는 소리 그것도 진언이구요.

교회에서 찬송하는 소리 그 소리도 진언입니다.

모든 들리는 소리가 진언입니다.

그 소리가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 소리는 몸의 어떤 기관에서 나왔다던가 아니면 과학적으로 제가 이걸 설명해 드리려고 봤더니

소리가 뭐냐 봤더니 과학에는 이렇게 나오대요.

신체중에 발성기관 폐나 후두나 인후강이나 구강이나 입술에 의해서 폐속의 공기가 후두를 통과하면서 공기의 진동을 유발하여 몸속을 통과하며 음색이 만들어지며 구강과 입술을 통과하면서 이해할 수 있는 소리로 만들어지는 것이게 과학적인 지식으로 소리더라구요.

이렇게 이해하는 거 말고

우리가 말을 할 때 어떤 소리가 났을 때

그 소리가 어떻게 났는지

당처가 있다는 거죠.

그 소리가 나오는 자리가 있다는 거죠.

그 소리가 나오는 배경 바탕 같은 게 있다는 거죠.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참된 성품자리

맛도 없고 색깔도 없고 크기도 없고 냄새도 없고 어떤 특별한 모양이 없는

이 우주 어디에도 없지 않은

크기로 하면 너무나도 크지만

작기로 하면 어떤 티끌 속에도 담겨 있는

그 모든 우주가 나온 배경의 자리라는 것이죠.

모든 소리가 나온 배경일뿐 아니라

모든 물질이 나온 배경으로 우주가 나온 바탕이라는 거죠.

그림을 그리려면 스케치북이 있어야지만 어떤 바탕 벽이 됐든

어떤 바탕이 있어야지만 그릴 수가 있어요.

배경은 깨끗해야지만 그림이 잘 나올 수 있어요.

 

그거와 똑같이 여러분들이 나오려면 말을 하려면 생각을 하려면 소리를 들으려면

눈귀코혀몸뜻으로 색성향미촉법을 접촉하려면

모든 삶이 일어나려면 그 배경이 있어야 합니다.

스케치북 같은 어떤 배경이 있어야 한단 말이죠.

불성이라는 배경은 본래자리라는 배경은

그렇게 어떤 특질한 물질이라든가 모양으로 된 것이 아니다.

금강경에서는 상을 타파해라라고 하죠.

그 어떤 상으로도 그려지는 것이 아니다.

 

제가 지금 하는 얘기들 앞으로 하는 얘기들이

여러분들이 이해가 안되더라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이해 되면 안돼요.

이해가 안돼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면 되냐 하면

법사님은 이해도 안되고 난 깨달음 관심도 없고 돈만 벌고 잘살면 되는데 그런 얘기 하지 마십시오하시지 말고 수희찬탄을 하면서 내가 모르겠지만 저기 뭔가가 있구나

나는 모르겠지만 저 뜻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기 뭔가가 있으니까 저렇게 얘기하시는구나.

여러분들이 해야 할 유일한 한가지는 뭐냐 하면

뭔지 모르겠지만 뭔가가 있으니까 저렇게 얘기를 하는구나.

난 뭔지 모르겠다.

알겠다 하면 그건 틀린 거에요.

알겠다 하면 그건 아닙니다

알겠다 하면 아니에요.

알겠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되고 생각이 움직이면 안되고

모르겠다 도대체

내가 무식해서 그러나 이런 생각도 할 필요 없이

모르겠다 해야 합니다.

그래서 숭산 스님이 오직 모를 뿐하는 사람만이 진짜 공부한 사람이란 거에요.

제자들에게 스님들에게 알겠다 하면 때렸단 말이에요.

조금이라도 알겠다 하고 말을 꺼내기만 하면

모르겠다 해야지만 공부 잘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제가 한 얘기가 뭔지 모르잖아요.

낙처가 뭔지 모르잖아요.

이게 공부 잘하고 있는 거라니까요.

몰라야 공부 잘하는 거지 안다고 생각하면

공부 못하는 겁니다.

똑똑한 사람들이 이렇게 얘기하면 머리를 굴리기 시작해요.

소리가 나는 배경 그게 뭘까?

과학에서 말하는 뭔가?

이렇게 머리 굴리는데 그건 아니란 거죠.

머리 굴리지 말고

머리를 탁 닫아 버리는 겁니다.

생각을 탁 닫아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뭘 하라는 거에요, 우리보고 뭘 하란 얘기입니까?

그냥 듣기만 하란 겁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거에요.

불법을 진짜 제대로 공부 하는 사람은 해도 안되고 안 해도 안 된다는 표현을 쓰는 겁니다.

법문에 귀 기울이는 것

법문에 자꾸 눈이 가고 귀가 가고

그러면서 법을 가까이 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

마음은 있는데 방법을 몰라

그게 바로 제대로 된 방법이에요.

이 방법대로 하면 깨닫는다.

모든 이 방법대로 하면 깨닫는다 하는 그 방법은 틀린 겁니다.

이 말을 여러분들이 이해하는데 모르긴 해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왜냐하면

염불하면 깨닫는다

참선하면 깨닫는다

간화선하면 깨닫는다

화두 들면 깨닫는다

위빠사나 하면 깨닫는다

다 그렇게 공부 했잖아요 지금까지

이것하면 깨닫는다고 하는 모든 것들이 틀렸다고 하면 곧이곧대로 믿겠습니까, 여러 분들이?

이게 점차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이 얘기는 어찌 보면 파격, 불교는 모든 격식을 파하는 거에요.

모든 가지고 있던 것을 빼앗는 거

방편으로 이대로 하면 깨닫는다고 하는 단계가 있단 말이죠.

어느 정도 단계가 가면 그것조차 빼앗아야 하는 단계가 옵니다.

전 그 윗 단계를 얘기한 거죠.

이대로 하면 깨닫는다는 것을 모든 것을 부정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그것조차 놓았을 때 깨닫는다.

이게 모든 선사들 부처님이 깨달은 방법입니다.

부처님이 그 당시 유행했던 모든 것을 다 했죠.

처음에 선정주의라고 해서 참선을 열심히 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했는데 최고 단계까지 갔는데 깨달음을 얻지 못 했어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에 고행주의라고 해서 그 당시에 고행을 하면 깨닫는다 해서

삼천배도 하고 만배도 하고 장자불와도 하고 고행을 해봤다는 거죠, 육년간.

그래도 안됐어요.

그러다가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는구나 다 포기하고

고행할 때는 우유죽 먹으면 안 되는데 우유죽 받아 먹고

이렇게 해도 안되고 저렇게 해도 안 되는구나

이 방법도 안되고 저 방법도 안 되는구나.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한데 이제 방법이 없어진 거에요.

이 방법도 안되고 저 방법도 안 되는구나.

그 어떤 방법도 쓸 수가 없구나

그러다 보니까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

안주하고 있던 모든 것들이 다 없어져 버린 거죠.

다 없어져 버리니까 칠일만에 깨달음을 얻었단 말이죠.

모든 스님들 선지식들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깨닫습니다.

될 것 같고 될 것 같고 내가 깨달음을 얻을 거 같은데 같은데 하다가

딱 내려놓는 순간 깨달음은 온다는 거죠.

 

이렇게 모든 진언은 그 낙처가 자신의 본래 성품을 보게 해주기 위한 것으로써 모든 진언을 설한다.

그러나 진언마다 하나의 방편도 있습니다.

정구업진언이라는 진언의 방편은 입으로 짓는 구업들을 모두 청정히 하고 난 다음에 이 공부를 시작하라는 의미에서 정구업진언을 하죠.

바른 깨달음의 가르침을 공부할 때

입으로 짓는 수많은 죄업들을 가지고 있게 되면 거기에 얽매여 가지고 공부가 잘 되지 않겠죠.

입으로 짓는 많은 업들 이런것들을 청정히 해서

경전을 독송할 때는 구업을 청정히 먼저 하자

깨끗한 마음으로 경전을 독송하자 하는 마음으로

정구업진언을 가장 먼저 하는 것입니다.

말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소리라는 파장이고 파동이잖아요.

하나의 파동은 그 파동 안에 양자물리학에서 밝혀낸 진실인데요.

소리 파동이 됐든 전자 파동이 됐든

파동은 그 파동 안에 무한한 정보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파동 속에 온 우주의 모든 정보를 다 담고 있다.

온 우주의 모든 삶의 비밀 삶의 이치를 다 담고 있다고 합니다.

소리를 낸다는 것이 업 가운데 하나잖아요.

말의 파동이라는 것 자체가 너무나 중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랑 이 친구랑 단둘이 있어요.

내가 봐서 쉽게 생각하는 친구에요.

비중을 얕게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 사람에게 욕을 한마디 합니다

아니면 말로 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이 소리 파동은 나와 이 사람 둘간에만 펼쳐지는 둘 사이에만 일어나는 소리가 아닙니다.  

욕을 한마디 했을 때 그때만 일어나는 게 아니에요.

모든 파동 파장은 온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일미진중함시방

소리라는 파동 파장 하나 속에 그 파동 하나 속에 시방세계 전체가 머금어져 있는 겁니다.

소리는 났고 그 소리는 끝났으니까 그건 없어졌겠지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내 뱉은 말의 파동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우주 끝까지 진동해서 전파가 된다는 것이죠.

그 소리 파동은 결코 개인적으로 한정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업이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이 사람에게만 한마디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부처고 온 우주와 하나잖아요.

내가 일으킨 말 한마디가 온 우주를 진동시키고 온 우주에 영향을 미치는 겁니다.

말 한마디를 통해서 삶을 만들어 내고 창조해 내고 있는 겁니다

욕 한마디 할 때 부정적인 생각 부정적인 말 한마디 했을 때

모든 상대방에게 하는 말은 나 자신을 향한 말입니다.

너와 내가 둘이 없기 때문에 우주는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내가 소리 파동으로 일으키는 모든 말들은

전부 나 자신에게 향한 말입니다.

자식에서 습관적으로 혼내면서 습관적으로 욕을 한마디 했다.

나 자신에게 하는 것이고 온 우주에게 하는 거고 부처님께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말의 습관이라는 게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말의 습관을 말의 업을 먼저 청정하게 해야 하는 거죠.

 

저는 어릴 적에 어르신들이 욕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어른들은 욕을 안 하는 줄 알았어요.

어느 날 길을 가는데 어르신들 두 분이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면서 싸우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아 어른들도 저렇게 싸우는구나.

어른이 돼 가지고 그런 말투를 쓰신다는 것은 정말 충격적인 일입니다.

말투가 곧 내 삶을 만들어 내는 거니까.

말이라는 습관이 업이 되어서

말의 습관이 내 인생을 창조해 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모르니까 말의 습관을 함부로 막 쓰는 것이죠.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말의 습관 말의 업

이 단순한 것이 아주 중요한 삶을 만들어 가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그걸 가장 먼저 청정히 하고 그러고서 밝고 원만한 부처님의 말씀

경전을 독송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정구업진언을 가장 먼저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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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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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법신(法信) 작성시간 17.03.22 감사합니다..._()_
  • 작성자무상화 작성시간 17.03.22 스님, 감사합니다._()_
    법우님,감사합니다. _()_
    모든 도반님, 감사합니다._()_
  • 작성자무멍나 작성시간 17.03.25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 작성자그래 작성시간 17.05.11 감사합니다
  • 작성자조정(hoseung) 작성시간 17.12.30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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